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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나라를 구한 영웅들이 새롭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람이 한 분 계시는데요. 바로 양규장군입니다. 고려의 이순신이라 불려지는 이 분은 뛰어난 명장이었고, 나라를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수많은 고려인들을 구해내셨는데요. 그중에서도 양규장군의 흥화진전투와 곽주성탈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흥화진 전투의 시작
요나라의왕 성종이 40만 거란병사를 이끌고 흥화진을 침략합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 가장 강력한이유는 첫째, 목종은 요나라가 세운 왕인데 강조가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현종을 왕으로 세웠죠. 이에 화가난 요나라가 강조를 내어놓으라고 하지만, 고려의 실권을 잡은 강조가 계속 버티고 이것이 침략의 이유가 됩니다.
둘째는 요나라의 왕 성종은 이전까지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해보지 않은 왕이었던지라, 이번기회로 공적을 쌓아 진정한 권력을 가진 왕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찌됐든 성종은 백성도 살지 않는 작은 진이었던 흥화진으로 내려오는데요. 도순검사 양규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원래 양규는 흥화진사였으나 강조의 신임을 얻어 도순검사가 되었는데요. 비록 강조의 반란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믿을만한 장수는 양규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서북면을 맡기기로 한 것이었죠.
원래는 도순검사를 맡으며 서경으로 자리를 옮겼어야 했지만, 만에하나 침략이 있다면 최전선인 흥화진에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곳에 머물렀다고 하는데요. 이 때 양규의 군사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순검사아래 군사가 3천명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흥화진을 지키는 군사는 3천에서 6천 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종은 전투의 첫날부터 흥화진 앞에서 고려 포로들을 처형하며 고려병사들의 사기를 꺾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고려병사들의 전투력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구요.
흥화진전투에서 양규의 전략
1. 투척기를 부숨.
흥화진 전투장면에서 불화살이 날아오는 장면 기억나실겁니다. 우선은 화살이 어디서 날아오는지를 관찰했던 것인데요. 무작정 공격해서 무기를 낭비하기 보다는, 거란의 화살이 날아오는 곳을 파악해 정확한 공격위치를 알고 공격했던 현명함이 돋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화살과 불덩이를 날리는 투척기를 먼저 부숨으로써, 1차공격을 막아냅니다.
2. 함마갱 설치
거란의 공격에 미리 대비를 해놨던 양규는 땅속에 함마갱을 잔뜩 묻어놨었는데요. 어찌나 촘촘히 묻어놨던지 거란병사가 오는 족족 모두 빠져 다치거나 죽었다고 하죠. 투척기를 못 쓰게 되자 보병부대를 투입했지만, 함마갱에 막혀 또다시 공격이 지체됩니다.
3. 맹화유 이용
고려에는 맹화유라는 맹렬히 타오른다는 이름의 기름이 있었는데요. 이것으로 성문을 부수러 달려오는 공성무기를 불태우면서 또 다시 공격을 막아냅니다.
4. 7일간의 끈기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고려병사들의 끈기와 이를 이끌어낸 양규장군의 지휘력일 것입니다. 7일간 이어진 전투에서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밤낮없이 활을 당기고 성을 지켰던 양규와 고려병사들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흥화진을 지켜낼 수 는 없었겠죠.
곽주성 공격에 성공한 요나라 성종
성종은 양규의 맹렬한 공세에 흥화진을 포기하고 밑으로 내려오는데요. 양규가 후방을 치지 못하도록 흥화진 아래 무로대라는 곳에 요나라병사 20만을 두고 옵니다. 이렇게 양규는 요나라 병사에 둘러싸여 흥화진에 갇힌것이나 다름없었는데요. 그렇게 성종은 곽주를 비롯한 3성을 차지하고 서경을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요나라로서는 보급기지로서 곽주성을 차지하고 그 곳에 요나라 병사 6천을 남겨두었는데요. 서경을 공략하고 있던 그 때, 곽주를 다시 빼앗기고 맙니다. 양규에게 말이죠. 양규는 무로대를 막아 가둬놓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무로대를 돌파하고 곽주성을 탈환
양규는 흥화진을 둘러싸고 있던 요나라병사를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는데요. 드라마에서는 양규의 병사가 대부분 보병으로 묘사되었지만, 아마도 기습적인 돌파를 위해서는 기병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정예병사 700명을 데리고 무로대를 돌파하였는데요.
통주성으로 들어가 다시 1000여명의 병사를 확보하고, 귀주성의 별장이었던 김숙흥을 불러 6000병사가 지키고 있던 귀주성으로 진격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공성전을 할 때에는 성을 지키는 병사의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의 병사를 가지고 진격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곽주성을 지키고 있던 6000의 요나라병사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3만에서 6만의 병사가 공격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양규는 단 1700명의 병사로 곽주성으로 향하죠. 김숙흥이 귀주성에서 데려온 병사를 합해도 3천이 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드라마에서는 김숙흥이 일부러 포로로 잡혀 성안으로 침투하는 것으로 나왔었습니다. 그 안에서 신호를 받고 일을꾸며 성문을 여는 설정이었던것 기억하시죠?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적은 어떻게 곽주성을 탈환할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첫번째 가설은, 누군가가 곽주성의 내부와 연락하여 성문을 열게하고 2000명 내외의 고려병사가 기습하여 성 안으로 뚫고 들어갔을 거라는 것인데요. 요나라병사 6천은 대부분 보병이었을 것이므로 신빙성 있는 가설이라고 합니다.
혹은, 6천병력 일부를 성 밖으로 유인하여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기록된 것은 양규가 곽주성을 공격하는 날 유성이 떨어졌다는 것인데요.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곽주성을 탈환하고도 그 안에 있던 7000명의 고려백성들은 다른 성으로 모두 이동시켰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곽주성에 머무를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그것이 곽주성 탈환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양규가 적은 병사로 몇 배나 되는 요나라병사들을 대적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고려의 이순신이라는 말이 정말 딱 어울리는 전술에 능하고 나라에 대한 충심이 높은 진정한 무인이었다는 존경심이 드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